마지막 남은 자유
강제수용소에서도 인간에게 남은 건 단 하나, 태도를 선택할 자유라는 프랭클의 말이 오래 남았다. 예전 ‘싯다르타’를 덮으며 느꼈던 내면의 울림이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고요한 강가 대신 철조망이 둘러싼 지옥이 배경이지만, 두 책이 던지는 질문은 같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떤 태도로 존재할 것인가?”
수용소의 선택들
프랭클은 수용소의 일상을 ‘존엄을 지킬 것인가, 체념할 것인가’라는 선택의 연속이라 말한다. 끼니도, 잠자리도, 가족도 빼앗긴 그곳에서조차 눈길 하나, 미소 하나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다. 그는 이를 ‘태도 연습의 무대’라 불렀다. 죽음이 일상인 공간에서도 선택은 살아 있었고, 선택은 곧 의미가 되었다.
싯다르타와의 연결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역시 삶의 강 한가운데서 내면의 소리를 듣고 매번 새 길을 택했다. 부와 금욕, 쾌락과 고통을 지나 결국 찾은 답은 바깥이 아닌 마음속에 있었다. 수용소와 강가, 극과 극의 배경은 달랐지만 “나를 규정하는 것은 상황이 아닌 태도”라는 메시지는 정확히 겹쳐졌다.
싯다르타 이후 반복되는 피로와 무력감을 느낄 때마다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잠시 멈춰 서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상황이 내게 요구하는 태도는 무엇인가?그렇게 마음을 가다듬고 나면,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잠시 멈춤‑질문‑결정, 단순한 3단계지만 지금까지 가장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졌다.
결론
삶은 질문을 던지고, 우리는 태도로 답한다. 오늘 내게 남은 자유는 ‘반응’이 아니라 ‘선택’이다. 지금, 당신은 어떤 태도를 선택하고 있는가?
문장 스크랩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해야 했다. 매일같이, 매시간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그 결정이란 당신으로부터 자아와 내적인 자유를 빼앗아 가겠다고 위협하는 저 부당한 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그 결정은 당신이 보통 수감자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하고 환경의 노리개가 되느냐 마느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었다. p108
사실 수용소에서도 긍정적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이 기회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 버린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수용소의 어려운 상황을 자기 정신력을 시험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대신 스스로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아무런 성과도 없는 그 어떤 것으로 경멸한다. 그들은 눈을 감고 과거 속에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에게 인생은 의미 없는 것이 된다. 평범하고 의욕 없는 사람들에게는 비스마르크의 이 말을 들려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생이란 치과 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 있는 것이다.
강제 수용소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인생의 진정한 기회가 자기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삶의 지침을 돌려놓았던 그런 경험의 승리를 정신적인 승리로 만들 수도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도전을 무시하고, 다른 대부분의 수감자처럼 무의미하게 보낼 수도 있었다. p117-118
미래 그 자신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블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대체로 이런 현상은 아침에 수감자가 옷 입고 세수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아니면 연병장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간청과 주먹질, 위협도 효과가 없다. 그냥 누워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만약 이런 위기가 병 때문에 생긴 것일 경우 그는 병실로 옮겨지는 것을 거부하고, 그 밖에 도움에 되는 그 어떤 것도 거부한다. 그냥 포기하는 것이다. 자기가 싼 배설물 위에 그냥 그렇게 누워 있으려고만 한다. 세상 어떤 것으로부터도 더이상 간섭받지 않고. p120
수용소에서 사람의 정신력을 회복시키려면 그에게 먼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 주는 데 성공해야 한다. 니체가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이 말은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심리 치료와 정신 위생학적 치료를 하려는 사람에게 귀감이 되는 말이다. 수감자를 치료할 기회가 있을 때 그들이 처한 끔찍한 현실을 어떻게든 견딜 수 있는 힘을 주려면 그들에게 살아야 할 이유, 즉 목표를 얘기해 주어야 한다. p123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 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생각이었다. 이 생각들은 우리가 살아서 그곳을 나올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때에도 절망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었다. p125
근래 들어 인간은 또 다른 상실감을 맛보게 됐는데, 그것은 그간 자기 행동을 지탱해 주던 전통이 빠른 속도로 와해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해 주는 본능도 없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는 전통도 없다.
어떤 때는 스스로도 자기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정도가 됐다. 그 결과 남이하는 대로 따라 하거나(동조주의) 아니면 남이 시키는 대로(전체주
의)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런 실존적 공허는 대개 권태를 느끼는 상태에서 나타난다. p160
인간은 추상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구체적인 과제를 수행할 특정한
일과 사명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의 삶 역시 반복될 수 없다.
삶에서 마주치는 각각의 상황이 한 인간애게는 도전이며, 그것이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시한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짐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이 말처럼 인간의 책임감을 자극하기에 좋은 말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첫째 현재가 지나간 과거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둘째 지나간 과거가 아직도 변경되고 수정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런 교훈은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유한성'은 물론, 그가 자신과 자신의 삶으로부터 성취해 낸 성과의 '궁극성'과도 대면하게 만든다. p163-164
자기 자신을 잊으면 잊을수록 ㅡ스스로 봉사할 이유를 찾거나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을 통해ㅡ더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더 잘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소위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는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자아실현을 갈구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아실현은 자아 초월의 부수적인 결과로서만 얻어진다는 말이다. p166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첫 번째를 완수하고 달성하는 방법은 아주 분명하다. 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에는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두 번째 방법은 어떤 것, 선이나 진리 아름다움을 체험하는 것, 자연과 문화를 체험하거나 (마지막이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체험하는 것, 즉 그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p166-167
이것은 정상적인 의미의 치료는 아니있다. 왜냐하면 첫째, 그의 절망은 병이 아니있으며, 둘째, 내가 그의 운명을 바꿀 수 있거나 그의 아내를 살릴 수도 없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나는 바꿀 수 없는 운명에 대한 그의 태도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이제 그는 최소한 자기가 겪고 있는 시련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됐다.
인간의 주된 관심이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데 있다는 것은 로고테라피의 기본 신조 중 하나이다. 자기 시련이 어민 의미를 갖는 상황에서 인간이 기꺼이 그 시런을 견디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p169
사람은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나 혹은 자기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경우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시련의 불가피성이다.
이런 시련의 도전을 용감하게 받아들이면 삶은 마지막 순간까지 의미를 갖게 되며, 그 의미는 글자 그대로 죽을 때까지 보존된다. 다시 말해 삶의 의미는 절대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시련의 잠재적인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p171
당시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스물여닭 중 한 명도 채 안 됐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어느 누구도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내 삶이 궁극적으로 아무 의미 없는가 하는 의문에 직면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렇게 치열하게 고민해 오던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이미 갖고 있었으며, 그 후 곧 의문에 대한 해답이 주어지리라는 사실을 깨단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은 내가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대신 아우슈비츠 기차역에 도착하자마자 곧 가스실로 보내진 수감자의 누더기 옷을 물려받았을 때였다.
나는 물려받은 그 외투에서 히브리 기도책에서 찢어 낸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그것은 유대교 기도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셰마 이스라엘Shema Yisrael>이었다. 나는 이렇게 기막힌 '우연의 일치'를 단지 종이에 적지만 말고
그대로 '살라고' 하는 신의 계시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곧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런 가혹한 상황에서 내 관심은 대부분의 동료들과는 달랐다. 그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이 모든 시련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내가 갖고 있었던 의문은 이런 것이었다. '과연 이 모든 시련, 옆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이런 상황이 의미 있는 것일까? 왜냐하면 만약 그렇지 않다면 궁극적으로 여기서 살아남아야 할 의미가 없기 때문에. 탈출하느냐 마느나와 같은 우연에 의해 그 의미가 좌우되는 삶이라면 그것은 전혀 살아갈 가치가 없는 삶이기 때문에.’ p171-172
인간 세계를 초월하는 또 다른 차원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나요? 인간이 겪는 시련의 궁극적인 의미를 묻는 질문에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그런 또 다른 차원의 세계 말입니다.
이런 궁극적인 의미는 인간이 지닌 지적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로고테라피에서는 이것을 초의미 super meaning라고 부른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실존 철학자들이 가르친 대로 삶의 무의미함을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절대적인 의미를 합리적으로 터득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로고스는 논리보다 심오하다. p176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젊은이들을 보면서 부러워하거나 잃어버린 자신의 청춘에 대해 향수를 가질 이유가 있을까? 무엇 때문에 그가 젊은이를 부러워하겠는가? 그 젊은이
에게 놓여 있는 잠재 가능성 때문에? 아니면 그가 지닌 미래 때문에? 천만의 말씀.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가능성 대신에 나는 내 과거 속에 어떤 실체를 갖고 있어. 내가 했던 일, 내가 했던 사랑뿐만 아니라 내가 용감하게 견뎌 냈던 시련이라는 실체까지도 말이야. 이 고통들은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지. 비록 남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p180
로고테라피에서 활용되는 '역설 의도paradoxical intention' 기법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것이다. 즉 마음속 두려움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일을 생기게 하고 (예기 불안), 지나친 주의 집중이 오히려 원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p182
신경 질환 환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웃을 줄 알게 되면 그것은 그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상태, 아니 어쩌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설 의도는 이런 올포트의 주장을 경험적으로 입증하고 임상적으로 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치료를 시작했을 때, 그에게 평소 하던 일과 정반대되는 일을 해 보라고 권했다. 말하자면 되도록 글씨를 깨끗하게 정자로 쓰려고 하지 말고 아무렇게나 휘같겨 써 보라고 권한 것이다. 그러면서 스스로 이렇게 말하라고 했다.
"내가 얼마나 글씨를 엉망으로 쓰는지 사람들한테 있는 그대로 보여 줄 테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서 글씨를 휘갈겨 쓰려고 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글씨를 휘갈겨 쓰려고 했는데 잘 안 되더군요."
그가 다음 날 말했다. 이런 방법으로 그 환자는 48시간 만에 손 떨림 증세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으며, 이후 관찰 기간에도 증상이 재발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행복해졌고, 자기 일을 잘할 수 있게 됐다 p184-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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